첫결혼 6년차, 다섯 번의 이사... 매일 이별하며 살고 있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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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관리자 작성일24-09-03 16:51 조회72회 댓글0건본문
△ 첫 집은 편의점이 가까웠다. 뒷문으로 나가 여덟 걸음 정도 걸으면 편의점이었다. 예나 지금이나 편의점은 24시간 열려 있지만 부모님과 함께 살던 시절에는 통금도 있고 거리도 있어 아무 때나 막, 자유롭게 막, 드나들지는 못했다. 첫 집에서는 우유가 떨어지면 언제든 사올 수 있고, 자정이 지난 시간에 신랑과 수면바지를 입고 슬리퍼를 신고 나가서 야식을 먹을 수도 있었다. 당시 내게 결혼의 맛은 편의점 신상 과자인 ‘청양마요 먹태깡’처럼 자극적이지만 안전한, 일탈의 맛이었다. 하지만 그 집에서 나는 모두가 잠든 밤이면 집에 가고 싶었다. 집에 있는데도 집에 가고 싶었다. 결혼해서 가장 놀란 점은 남자친구였던 남편이 “내 간디” 세 글자만 남기고 곧장 램수면에 빠진다는 사실이었다. 눈으로 보면서도 믿기지가 않아 괜스레 자는 남편 콧구멍에 손가락도 넣어보고 눈꺼풀을 들어올려도 봤지만 보이는 건 흰자위뿐이었다. 안 그래도 잠드는 데 오래 걸리는 나는 밤이 되면 더욱 낯설어 보이는 집에서 홀로 깨어 어리둥절했다. 남자들은 결혼을 실감할 때가 여자친구가 데이트가 끝나도 집에 안 갈때라고 하는데, 여자친구도 집에 가고 싶기는 마찬가지다. (친정집에 가고 싶었던 건 아니다. 나는 어디를 가고 싶었던 걸까.) 몸은 결혼예식 후 신혼집이라는 곳에 와 있지만, 영혼은 아직 도착하지 않은 날들. 함께 깨어 있던 편의점 불빛은 창밖으로도 꽤나 위안이 되었다. 그래도 잠이 안 오는 밤이면 그 옛날 열다섯 열여섯에 얼굴도 모르는 신랑과 혼인해 산 넘고 물 건너 시집와 살았을 어린 신부들을 생각했다. 서른이 넘은 나도 밤이면 이렇게 막막한데 그들은 어떻게 견뎌냈을까. 새벽녘 아궁이에 서툴게 불을 때다 눈이 매운 김에 좀 울지는 않았을까. 다들 그렇게 살았고 살아왔다는 게 층층시하 9첩 반상 같은 시집살이를 견디는 한 꼬집의 위로가 되어줬을까.
△ 두 번째 집은 첫 번째 집 큰길 건너 바로 옆에 있었다. 첫 집은 신랑이 결혼 전 살던 집에 포개어 살았던 곳이다. 두 번째 집은 아직 지어지던 중이었다. 밤에 산책을 핑계 삼아 나가서는 공연히 공사장 주변을 어슬렁거렸다. 잘 보이지도 않는 진회색 콘크리트 덩어리 사이에서 “저 정도 즈음이 우리 집일까” “아니 저쪽 같은데” 괜히 실눈을 뜨고 실없는 대화를 나누기도 했다. 두 번째 집은 수영장이 가까웠다. 수영장에 풍덩 들어갈 일보다 수영장 물 냄새를 맡으며 지나갈 일이 더 많을 것이면서도 수영장 가까이 사는 게 좋았다. 당장 가지는 않지만 언제든 갈 수 있다는 가능성만으로도 건강해지는 기분이었다. (실제로 자주 가지는 않았고 그마저도 강습 대신 자유수영을 선택해서 물속을 걸어 다니는 시간이 수영하는 시간과 비슷하거나 더 많았다.) 집을 선택하는 여러 개의 기준이 있을 텐데 내게는 수영장도 꽤나 상위에 있었다. 자주 접근하지 않는 수영장의 접근성. 그로 인해 어쩌면 건강해질지도 모르는 가능성. 당시 수영장 가까운 두 번째 집을 중개해 준 부동산 사장님이 같은 동에 살았다. 부동산에서는 프로페셔널했던 사장님도 엘리베이터나 분리수거장에서 만나면 그저 이웃 주민이었다. 사장님도 사춘기 딸 앞에서는 할 말 많지만 참는 엄마였고, 고단한 워킹맘이었다. 프로의 세계에서 만났던 사장님의 생활의 얼굴을 보는 것은 신기한 경험이었다. (수영장에서는 만나지 않아 다행이었다.) 두 번째 집에서 기다리던 아기가 찾아왔다. 기다리지 않은 입덧도 함께 찾아왔다. 두 번째 집은 한 대학 캠퍼스 옆이었는데, 캠퍼스라면 빠질 수 없는 먹자골목이 안팎으로 즐비했다. 나는 출퇴근길 버스에서 이미 승객 모두의 살 냄새와 그들이 뿌리는 향수 냄새, 버스에 타기 직전 태운 담배 냄새까지 맡은 참이었는데, 내려서 본격적으로 쏟아지는 온갖 메뉴의 전방위 공격을 막아낼 재간이 없었다. 콧구멍은 두 개였지만 맛집은 너무 많았고 먹고 취해 비틀거리는 학생들은 더 많았다. (물론 나도 임신 전에는 그들 중에 있었다.) 황소곱창, 무한리필 조개구이, 소머리국밥 등 각 음식점의 대표 메뉴를 써놓은 간판만 봐도, 배달 오토바이만 봐도 속이 울렁거렸다. 먹자골목은 내게 막다른 골목이었고 식당은 많지만 먹을 수 있는 건 없었다. 배가 나올수록 팔다리는 점점 더 야위어갔고 몸의 체형이 장수풍뎅이와 가까워질 무렵 세 번째 집으로 이사를 갔다.
△ 세 번째 집은 친정에서 가까웠다. 생존을 위한 선택이었다. 늦가을 바람이 불면서 낙엽이 떨어지고 있었다. 입시를 치른 지 15년은 지났는데 ‘수능이 가까워오는구나’ 싶은 계절, 지하철 세 정거장 거리였던 엄마 집에 가서 겨울김치를 통통한 멸치와 지진 김치찜을 먹었다. 클 때도 마땅한 반찬이 없으면 엄마가 해주던 음식이었다. 늘 먹던 그 맛이었는데 어느새 밥 한 그릇을 비웠다. 이게 얼마 만인가 생각하며 소파에 누워 까무룩 잠이 들었다. 잠 틈으로 간간이 아홉 시 뉴스 소리가 들렸고, (스물둘, 호주로 워킹홀리데이를 떠나기 전에 급히 찍어둔) 가족사진이 걸린 벽이 보였다. 엄마 아빠가 저땐 저렇게 젊었나, 같이 살 땐 늘 벽에 붙어 있는 벽지 같아 몰랐는데 새삼스러웠다. 아무리 시간이 지나도 익숙해질 것 같지 않던 입덧의 파도가 익숙한 풍경 속에서 잠잠해지고 있었다. 한겨울에 아이가 태어났고, 엄마는 영하의 추위를 뚫고 막 끓인 미역국과 밑반찬들을 가지고 매일 마을버스를 타고 우리 집에 왔다. 겨울에 아이를 낳았지만 몇 주째 밖에 나가지 못하고 있었기 때문에 엄마가 데리고 들어온 찬 기운으로 바깥 날씨를 짐작했다. 문 앞에 택배를 두고 가는 기사님도 반갑다는 아이의 신생아 시절, 나는 남편과 함께 본격 육아 캠프에 입소한… 줄 알았는데, 입대를 한 건 나뿐이고 남편은 하루에 한 번 면회를 왔다. 교대근무도 쉽지 않았다. 전우들은 집이 아니라 조리원에 있었고, 각자 퇴소 후 치열한 전투를 펼치고 있었다. 면허증도 없이 사령관님(같은 아기)을 태운 운전병이 된 것 같은 첫아이의 육아. “우리 애만 이런 건 아니지?”를 확인하는 조리원 단톡방은 멘탈의 길을 잃지 않게 해주는 내비게이션이었다. (물론 “우리 남편만 이런 건 아니지?”도 나눴다. 여보 미안.) 첫아이가 태어날 시기는, 각자의 직장에서 맡은 바 임무도 과중해지는 시기다. 한쪽은 야근으로, 한쪽은 밤샘 육아로 체력은 소진됐지만 마음은 날로 앙칼져갔다. 강추위를 뚫고 출퇴근하는 도토리와 겨울 섬에 고립된 도토리가 서로 키재기를 하며 많이도 싸웠다. (지금도 내 키가 조금은 더 컸다고 생각하는 뒤끝을 가지고 있다.)
△ 네 번째 집은 친정과 같은 동이었다. 이유는 세 번째 집에서 설명한 바와 같다. 친정엄마가 집에 머무르는 시간이 남편이 머무는 시간보다 압도적으로 길었고 복직이 가까이 다가왔다. 운전을 못하는 엄마의 동선을 줄여야 했다. 그러면서 조리원도, 스마트폰도, 당근마켓도, 바운서(자동으로 흔들리는 요람, 여기서 잘 자는 아이도 있고 아닌 아이도 있다)도, 분유포트도, 이유식 메이커도, 아니 심지어 일회용 기저귀나 물티슈도 없던 시절, 엄마는 연탄을 매일 갈아야 하는 단칸방에서 천기저귀와 가제수건을 삶으며 나와 언니를 어떻게 키웠는가 심각하게 고민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각이 안 나왔다. 인간은 결코, 스스로, 혼자, 크지 않는다. 그런 말을 하면 엄마는 그저 희미하게 웃었다. 당시의 엄마는 나보다 열 살 정도 어렸고, 친정엄마도 곁에 없었다. 그리고 당시 아빠는 우리 남편보다 더하면 더했지 결코 덜하지 않았을 것이다. (아빠 미안.) 1년의 육아휴직을 마치고 출근하는 날, 엘리베이터를 타고 친정에 아이를 맡겼다. 그러면서 친정엄마의 육아는 언제 끝나는지 잠시 생각했던 것 같다. 물론 아직도 끝나진 않았다.
△ 다섯 번째 집은 나의 살던 고향과 가깝다. 넉 달 후 이사가 예정되어 있다. 나는 한 아파트에서 열 살 때부터 서른다섯 살까지 25년을 살았다. (내가 이사를 나온 서른다섯은 엄마가 그 집에 이사 갔을 때 나이다.) 그 집은 내가 초등학교를 다닐 때부터 이미 오래된 아파트였고, 곧 재건축을 할 것이라는 현수막, 찬성률이 얼마를 넘었고, 무슨 승인을 받았다는 현수막이 붙었다가 떼어졌다 했다. 나중엔 그냥 그러려니 하는 심상한 풍경이 됐다. 엘리베이터가 자주 멈추고, 여름이면 뜨거운 물이 단수되는 아파트였지만 사방에 나무가 울창했다. 잠자리며 매미를 잡고 놀기 좋았고, 단지가 커서 놀이터도 정자도 많았다. 거기에서 얼음땡과 땅따먹기 놀이를 했고, 마을 어른들은 돗자리를 펴놓고 빨간 고추를 말리거나 정자에 앉아 마늘을 깠다. 교복을 입던 시절에는 공연히 집에 가기 싫어서 이어폰을 꽂고 이적의 〈별이 빛나는 밤에〉나 유희열의 〈음악도시〉, 정지영의 〈스위트 뮤직박스〉 같은 라디오를 들으며 한참을 정자에 앉아 있었다. 내가 재수생일 때도 대학생일 때도 취업준비생일 때도 사회초년생일 때도 놀이터와 정자나무는 늘 그 자리에 있었다. 그러다 진짜, 재건축을 한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이번엔 정말이었다. 사람들이 모두 짐을 싸서 다른 집으로 옮겼고, 곧 빈 건물과 우람한 나무와 고양이들만 남았다. 나의 살던 고향, 오래된 주공아파트가 허물어지자 내 유년의 기억도, 사춘기 시절의 불안한 권태도, 백수 시절 집에만 있기 불편해 밀크셰이크에 감자튀김 하나 시켜놓고 시간을 때우던 패스트푸드 전문점도 모두 사라졌다. 고향으로 가지만 고향의 흔적은 없다. 내가 연어라면 돌아갈 길을 잃을 판이다. 하지만 나는 사람이라 어디가 어떻게 달라졌는지 안다. (다행히 국민 떡볶이집은 아들이 아버지가 하던 것을 이어받아 지금도 하고 있다.) 30대였던 부모님은 70대가 되어서 다시 그 집에 돌아간다. 부모님은 달라진 풍경에 적응할 수 있을까. 늘 주차난에 시달리던 지상주차장이 지하로 바뀐 것은 반가운 일이지만, 아빠가 자꾸 지하주차장에서 길을 잃어 걱정이 되기도 한다. 그리고 우리도 부모님을 따라간다. 곧 아이가 초등학교에 입학할 것이고 어쩌면 내가 나온 초등학교에 다닐지도 모를 일이다. 아이를 기다린 집, 아이가 생긴 집, 아이가 걸음마를 시작한 집과 처음 어린이집에 다닌 집, 초등학교에 다닐 집이 모두 다른 집이다. 그사이 아이는 자랐고 내 부모는 조금 더 늙었다. 그렇다면 나는? 얼마나 자랐을까. 혹은 얼마나 닳았을까. 신혼부부를 보통 결혼 7년 차까지라고 하는데 7년이 되는 내년이면 우리 신혼도, 집을 따라 이동하던 떠돌이 생활도 마침표를 찍게 될까. 그러는 동안 나는 이사의 달인은 되지 못했지만 이별의 공식은 어느 정도 알게 됐다. 얼굴을 트고 일상을 나누던 또래 엄마들, 아이가 좋아해서 자주 가던 돈까스집과 바로 옆 아이스크림가게(나는 왜 웬만한 규모의 식당에 모두 돈까스 메뉴와 후식 아이스크림이 준비돼 있는지 아이를 낳고 알았다), 단골이 된 과일가게와 정육점과 모두 헤어져야 한다는 것. 그런데 거짓말처럼 또 터를 잡고 정을 붙이고 살게 된다는 것. 사람 사는 곳이란 어디든 다 비슷해서가 아니라 사람 사는 곳이란 거기에 사람이 살아서다. 화초도 분갈이를 하면 얼마간 앓는다. 그러다가 곧 더 굵게 큰다. 하나의 집은 나에게 하나의 나이테를 남겼다. 나의 살던 고향에 뿌리를 내릴지, 다시 짐을 싸게 될지 알 수 없지만 내일의 집은 내일 걱정하기로 한다. 매일 이별하며 살고 있는 이 별에서, 오늘의 일용할 집이 있다는 건 얼마나 감사한 일인지. (톱클래스 발췌)
△ 두 번째 집은 첫 번째 집 큰길 건너 바로 옆에 있었다. 첫 집은 신랑이 결혼 전 살던 집에 포개어 살았던 곳이다. 두 번째 집은 아직 지어지던 중이었다. 밤에 산책을 핑계 삼아 나가서는 공연히 공사장 주변을 어슬렁거렸다. 잘 보이지도 않는 진회색 콘크리트 덩어리 사이에서 “저 정도 즈음이 우리 집일까” “아니 저쪽 같은데” 괜히 실눈을 뜨고 실없는 대화를 나누기도 했다. 두 번째 집은 수영장이 가까웠다. 수영장에 풍덩 들어갈 일보다 수영장 물 냄새를 맡으며 지나갈 일이 더 많을 것이면서도 수영장 가까이 사는 게 좋았다. 당장 가지는 않지만 언제든 갈 수 있다는 가능성만으로도 건강해지는 기분이었다. (실제로 자주 가지는 않았고 그마저도 강습 대신 자유수영을 선택해서 물속을 걸어 다니는 시간이 수영하는 시간과 비슷하거나 더 많았다.) 집을 선택하는 여러 개의 기준이 있을 텐데 내게는 수영장도 꽤나 상위에 있었다. 자주 접근하지 않는 수영장의 접근성. 그로 인해 어쩌면 건강해질지도 모르는 가능성. 당시 수영장 가까운 두 번째 집을 중개해 준 부동산 사장님이 같은 동에 살았다. 부동산에서는 프로페셔널했던 사장님도 엘리베이터나 분리수거장에서 만나면 그저 이웃 주민이었다. 사장님도 사춘기 딸 앞에서는 할 말 많지만 참는 엄마였고, 고단한 워킹맘이었다. 프로의 세계에서 만났던 사장님의 생활의 얼굴을 보는 것은 신기한 경험이었다. (수영장에서는 만나지 않아 다행이었다.) 두 번째 집에서 기다리던 아기가 찾아왔다. 기다리지 않은 입덧도 함께 찾아왔다. 두 번째 집은 한 대학 캠퍼스 옆이었는데, 캠퍼스라면 빠질 수 없는 먹자골목이 안팎으로 즐비했다. 나는 출퇴근길 버스에서 이미 승객 모두의 살 냄새와 그들이 뿌리는 향수 냄새, 버스에 타기 직전 태운 담배 냄새까지 맡은 참이었는데, 내려서 본격적으로 쏟아지는 온갖 메뉴의 전방위 공격을 막아낼 재간이 없었다. 콧구멍은 두 개였지만 맛집은 너무 많았고 먹고 취해 비틀거리는 학생들은 더 많았다. (물론 나도 임신 전에는 그들 중에 있었다.) 황소곱창, 무한리필 조개구이, 소머리국밥 등 각 음식점의 대표 메뉴를 써놓은 간판만 봐도, 배달 오토바이만 봐도 속이 울렁거렸다. 먹자골목은 내게 막다른 골목이었고 식당은 많지만 먹을 수 있는 건 없었다. 배가 나올수록 팔다리는 점점 더 야위어갔고 몸의 체형이 장수풍뎅이와 가까워질 무렵 세 번째 집으로 이사를 갔다.
△ 세 번째 집은 친정에서 가까웠다. 생존을 위한 선택이었다. 늦가을 바람이 불면서 낙엽이 떨어지고 있었다. 입시를 치른 지 15년은 지났는데 ‘수능이 가까워오는구나’ 싶은 계절, 지하철 세 정거장 거리였던 엄마 집에 가서 겨울김치를 통통한 멸치와 지진 김치찜을 먹었다. 클 때도 마땅한 반찬이 없으면 엄마가 해주던 음식이었다. 늘 먹던 그 맛이었는데 어느새 밥 한 그릇을 비웠다. 이게 얼마 만인가 생각하며 소파에 누워 까무룩 잠이 들었다. 잠 틈으로 간간이 아홉 시 뉴스 소리가 들렸고, (스물둘, 호주로 워킹홀리데이를 떠나기 전에 급히 찍어둔) 가족사진이 걸린 벽이 보였다. 엄마 아빠가 저땐 저렇게 젊었나, 같이 살 땐 늘 벽에 붙어 있는 벽지 같아 몰랐는데 새삼스러웠다. 아무리 시간이 지나도 익숙해질 것 같지 않던 입덧의 파도가 익숙한 풍경 속에서 잠잠해지고 있었다. 한겨울에 아이가 태어났고, 엄마는 영하의 추위를 뚫고 막 끓인 미역국과 밑반찬들을 가지고 매일 마을버스를 타고 우리 집에 왔다. 겨울에 아이를 낳았지만 몇 주째 밖에 나가지 못하고 있었기 때문에 엄마가 데리고 들어온 찬 기운으로 바깥 날씨를 짐작했다. 문 앞에 택배를 두고 가는 기사님도 반갑다는 아이의 신생아 시절, 나는 남편과 함께 본격 육아 캠프에 입소한… 줄 알았는데, 입대를 한 건 나뿐이고 남편은 하루에 한 번 면회를 왔다. 교대근무도 쉽지 않았다. 전우들은 집이 아니라 조리원에 있었고, 각자 퇴소 후 치열한 전투를 펼치고 있었다. 면허증도 없이 사령관님(같은 아기)을 태운 운전병이 된 것 같은 첫아이의 육아. “우리 애만 이런 건 아니지?”를 확인하는 조리원 단톡방은 멘탈의 길을 잃지 않게 해주는 내비게이션이었다. (물론 “우리 남편만 이런 건 아니지?”도 나눴다. 여보 미안.) 첫아이가 태어날 시기는, 각자의 직장에서 맡은 바 임무도 과중해지는 시기다. 한쪽은 야근으로, 한쪽은 밤샘 육아로 체력은 소진됐지만 마음은 날로 앙칼져갔다. 강추위를 뚫고 출퇴근하는 도토리와 겨울 섬에 고립된 도토리가 서로 키재기를 하며 많이도 싸웠다. (지금도 내 키가 조금은 더 컸다고 생각하는 뒤끝을 가지고 있다.)
△ 네 번째 집은 친정과 같은 동이었다. 이유는 세 번째 집에서 설명한 바와 같다. 친정엄마가 집에 머무르는 시간이 남편이 머무는 시간보다 압도적으로 길었고 복직이 가까이 다가왔다. 운전을 못하는 엄마의 동선을 줄여야 했다. 그러면서 조리원도, 스마트폰도, 당근마켓도, 바운서(자동으로 흔들리는 요람, 여기서 잘 자는 아이도 있고 아닌 아이도 있다)도, 분유포트도, 이유식 메이커도, 아니 심지어 일회용 기저귀나 물티슈도 없던 시절, 엄마는 연탄을 매일 갈아야 하는 단칸방에서 천기저귀와 가제수건을 삶으며 나와 언니를 어떻게 키웠는가 심각하게 고민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각이 안 나왔다. 인간은 결코, 스스로, 혼자, 크지 않는다. 그런 말을 하면 엄마는 그저 희미하게 웃었다. 당시의 엄마는 나보다 열 살 정도 어렸고, 친정엄마도 곁에 없었다. 그리고 당시 아빠는 우리 남편보다 더하면 더했지 결코 덜하지 않았을 것이다. (아빠 미안.) 1년의 육아휴직을 마치고 출근하는 날, 엘리베이터를 타고 친정에 아이를 맡겼다. 그러면서 친정엄마의 육아는 언제 끝나는지 잠시 생각했던 것 같다. 물론 아직도 끝나진 않았다.
△ 다섯 번째 집은 나의 살던 고향과 가깝다. 넉 달 후 이사가 예정되어 있다. 나는 한 아파트에서 열 살 때부터 서른다섯 살까지 25년을 살았다. (내가 이사를 나온 서른다섯은 엄마가 그 집에 이사 갔을 때 나이다.) 그 집은 내가 초등학교를 다닐 때부터 이미 오래된 아파트였고, 곧 재건축을 할 것이라는 현수막, 찬성률이 얼마를 넘었고, 무슨 승인을 받았다는 현수막이 붙었다가 떼어졌다 했다. 나중엔 그냥 그러려니 하는 심상한 풍경이 됐다. 엘리베이터가 자주 멈추고, 여름이면 뜨거운 물이 단수되는 아파트였지만 사방에 나무가 울창했다. 잠자리며 매미를 잡고 놀기 좋았고, 단지가 커서 놀이터도 정자도 많았다. 거기에서 얼음땡과 땅따먹기 놀이를 했고, 마을 어른들은 돗자리를 펴놓고 빨간 고추를 말리거나 정자에 앉아 마늘을 깠다. 교복을 입던 시절에는 공연히 집에 가기 싫어서 이어폰을 꽂고 이적의 〈별이 빛나는 밤에〉나 유희열의 〈음악도시〉, 정지영의 〈스위트 뮤직박스〉 같은 라디오를 들으며 한참을 정자에 앉아 있었다. 내가 재수생일 때도 대학생일 때도 취업준비생일 때도 사회초년생일 때도 놀이터와 정자나무는 늘 그 자리에 있었다. 그러다 진짜, 재건축을 한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이번엔 정말이었다. 사람들이 모두 짐을 싸서 다른 집으로 옮겼고, 곧 빈 건물과 우람한 나무와 고양이들만 남았다. 나의 살던 고향, 오래된 주공아파트가 허물어지자 내 유년의 기억도, 사춘기 시절의 불안한 권태도, 백수 시절 집에만 있기 불편해 밀크셰이크에 감자튀김 하나 시켜놓고 시간을 때우던 패스트푸드 전문점도 모두 사라졌다. 고향으로 가지만 고향의 흔적은 없다. 내가 연어라면 돌아갈 길을 잃을 판이다. 하지만 나는 사람이라 어디가 어떻게 달라졌는지 안다. (다행히 국민 떡볶이집은 아들이 아버지가 하던 것을 이어받아 지금도 하고 있다.) 30대였던 부모님은 70대가 되어서 다시 그 집에 돌아간다. 부모님은 달라진 풍경에 적응할 수 있을까. 늘 주차난에 시달리던 지상주차장이 지하로 바뀐 것은 반가운 일이지만, 아빠가 자꾸 지하주차장에서 길을 잃어 걱정이 되기도 한다. 그리고 우리도 부모님을 따라간다. 곧 아이가 초등학교에 입학할 것이고 어쩌면 내가 나온 초등학교에 다닐지도 모를 일이다. 아이를 기다린 집, 아이가 생긴 집, 아이가 걸음마를 시작한 집과 처음 어린이집에 다닌 집, 초등학교에 다닐 집이 모두 다른 집이다. 그사이 아이는 자랐고 내 부모는 조금 더 늙었다. 그렇다면 나는? 얼마나 자랐을까. 혹은 얼마나 닳았을까. 신혼부부를 보통 결혼 7년 차까지라고 하는데 7년이 되는 내년이면 우리 신혼도, 집을 따라 이동하던 떠돌이 생활도 마침표를 찍게 될까. 그러는 동안 나는 이사의 달인은 되지 못했지만 이별의 공식은 어느 정도 알게 됐다. 얼굴을 트고 일상을 나누던 또래 엄마들, 아이가 좋아해서 자주 가던 돈까스집과 바로 옆 아이스크림가게(나는 왜 웬만한 규모의 식당에 모두 돈까스 메뉴와 후식 아이스크림이 준비돼 있는지 아이를 낳고 알았다), 단골이 된 과일가게와 정육점과 모두 헤어져야 한다는 것. 그런데 거짓말처럼 또 터를 잡고 정을 붙이고 살게 된다는 것. 사람 사는 곳이란 어디든 다 비슷해서가 아니라 사람 사는 곳이란 거기에 사람이 살아서다. 화초도 분갈이를 하면 얼마간 앓는다. 그러다가 곧 더 굵게 큰다. 하나의 집은 나에게 하나의 나이테를 남겼다. 나의 살던 고향에 뿌리를 내릴지, 다시 짐을 싸게 될지 알 수 없지만 내일의 집은 내일 걱정하기로 한다. 매일 이별하며 살고 있는 이 별에서, 오늘의 일용할 집이 있다는 건 얼마나 감사한 일인지. (톱클래스 발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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