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도 논쟁의 세 가지 키워드? 세종실록, 태정관, 칙령41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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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관리자 작성일24-07-26 09:38 조회137회 댓글0건본문
일본 네티즌이 BTS를 조롱하며 ‘다케시마(독도)는 일본 땅’이라는 주장을 했다는 뉴스가 나왔고, 강원도 삼척에선 ‘이사부독도기념관’이 개관했다는 뉴스도 나왔습니다. 대한민국 영토인 독도는 끊임없이 뉴스로 나오는 소재지만, 결코 ‘영토 분쟁 지역’으로 봐서는 안됩니다. ‘대한민국은 독도를 실효 지배하고 있다’는 문장은 ‘대한민국은 여의도를 실효 지배하고 있다’는 문장과 전혀 다를 바 없기 때문입니다. 만약 일본인과 독도 영유권에 관련한 논쟁을 벌이게 된다면, 세 가지 사실만 기억하면 논란의 여지가 없게 됩니다. 그것은 (1)세종실록 지리지 (2)태정관 지령 (3)칙령 제41호입니다.
①세종실록 지리지: 우산국=울릉도+독도
라 지증왕 13년인 서기 512년에 이사부 장군이 ‘우산국(于山國)’을 정벌해 신라 땅으로 만들었다는 ‘삼국사기’의 기록은 잘 알려져 있습니다. 그런데 일본에선 “너희 역사책에 나오는 ‘우산국’은 독도가 아니라 울릉도”라는 사람들이 있어요. 독도의 옛 이름이 ‘우산도’여서 혼동이 일어난 것으로 보입니다. 15세기 책 ‘세종실록지리지’에는 그에 대한 정답이 분명히 적혀 있습니다. “우산과 무릉이라는 두 섬이 울진현 동쪽 바다 가운데 있다. 두 섬은 거리가 멀지 않아 날씨가 맑으면 바라볼 수 있다. 신라 때는 우산국이라 불렀다.” 여기서 ‘우산’은 독도, ‘무릉’은 울릉도의 옛 이름입니다. 신라 때 ‘우산국’은 ‘무릉’과 ‘우산’이란 두 섬으로 이뤄졌다는 것을 알 수 있죠. 정리하자면 ‘우산국=무릉도+우산도’, 다시 말해 ‘우산국=울릉도+독도’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서기 512년 신라의 이사부가 우산국을 정벌했을 때 독도도 당연히 함께 신라 땅이 된 것입니다. 하지만 일본은 정반대 주장을 하고 있습니다. 여기 나오는 ‘우산도’는 독도가 아니라 울릉도 근처에 있는 관음도나 죽도라는 겁니다. 하지만 관음도와 죽도는 울릉도와 아주 가까운 곳에 있어서 날씨가 맑지 않은 날에도 볼 수 있기 때문에 ‘세종실록 지리지’의 설명과는 맞지 않습니다. 그럼 날씨가 맑으면 정말 울릉도에서 독도가 보일까요? 이것조차 부정하는 일본인이 있습니다만, 인터넷에서 조금만 검색해 보면 수많은 ‘인증 사진’을 볼 수 있답니다.
②태정관 지령: 독도는 일본 땅 아니다
일본은 17세기에 자기들이 독도 주변에서 어업 활동을 하면서 독도 영유권을 확보했다는 ‘독도 고유 영토론’을 주장하고 있습니다. 1618년 한 일본 주민이 일본 지방정부에서 ‘바다를 건너갈 수 있다’는 허가인 ‘울릉도 도해(渡海) 면허’를 받았다는 거죠. 하지만 허가를 받아야 갈 수 있었다는 것은 오히려 울릉도와 독도를 일본 땅으로 생각하지 않았다는 증거가 됩니다. ‘고유 영토론’이라는 게 말이 되지 않음을 보여주는 결정적 자료가 바로 일본 측 문서인 1877년 ‘태정관 지령’입니다. 태정관은 당시 일본 최고 행정기관이었습니다. 당시 시마네현에서는 일부 어부가 고기잡이를 하러 갔던 울릉도와 독도가 자기들 땅인지 아닌지를 일본 정부에 물었습니다. 그랬더니 태정관에선 “울릉도와 한 섬(독도)은 본방(本邦·우리나라)과 관계없음을 명심할 것”이라고 답했습니다. 독도가 일본 땅이 아니라는 것을 일본 스스로 법적 효력을 지니는 문서에서 인정한 것입니다. 문서에 첨부된 약도를 보면 지령의 ‘한 섬’이란 독도를 가리킨다는 사실이 명백하게 드러납니다. 이것은 17세기 조선과 일본이 주고받은 외교 문서를 근거로 나온 지령이기 때문에 ‘독도는 조선 땅’이라는 선언이나 마찬가지였습니다.
③칙령 제41호: 독도는 대한제국 영토
일본은 러·일 전쟁 중이던 1905년 1월 28일 내각 회의에서 독도를 ‘주인 없는 땅’인무주지(無主地)라 여기고 일본 영토에 편입하기로 결정했습니다(‘독도는 우리 땅’ 노래의 ‘러일전쟁 직후에’라는 가사는 실제 사실과 약간 다릅니다). 이 논리는 뭔가 이상하지 않습니까? ‘17세기에 독도를 고유 영토로 확보했다’는 주장과 앞뒤가 맞지도 않는 것입니다. 이것은 일본이 한국을 침탈하는 과정에서 일어난 불법적인 일이었습니다. 무엇보다 ‘무주지’라는 건 터무니없는 말이었습니다. 이보다 5년 앞선 1900년 10월 25일에 대한제국이 ‘칙령 제41호’를 통해서 독도가 대한제국 영토라는 사실을 명백히 했기 때문입니다. 칙령 제41호는 울릉도를 ‘울도군’으로 승격하면서 울도군의 관할 구역에 ‘석도(石島)’가 들어간다고 명기했습니다. 대한제국이 근대법 형식으로 독도에 대한 직접 주권을 행사했다는 근거입니다. 여기서 ‘석도’가 어디인지가 문제가 됩니다. 19세기 후반 전라도 남해안 어민들이 울릉도로 많이 이주했는데, 이 지방 사투리는 ‘돌’을 ‘독’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독도를 본 어민들은 이 섬을 ‘돌섬’이란 뜻으로 ‘독섬’이라 했고, 한자어로는 ‘석도’라고 적었습니다. 결국 ‘독섬’이 ‘독도’로 변했던 것입니다. 지금도 전남 고흥에는 ‘독섬’ ‘석도’ ‘독도’란 지명이 모두 여러 곳 존재합니다. 그러나 호남 사투리를 모르는 일본 사람들과 국내 일부 극우 세력은 아직도 “석도가 왜 독도인지 도무지 이해할 수 없다”며 우기고 있는 것입니다. 칙령 제41호에는 울도 군수가 세금을 징수할 수 있는 권한을 가진다는 조항도 있습니다. 그럼 당시 독도에서 강치를 잡아가던 일본인들은 어떻게 했을지 주목할 만합니다. 그들은 대한제국 울도 군수에게 ‘수출세’를 내고 있었습니다. 만약 독도가 일본 땅이었다면 이런 세금을 냈을 리가 없습니다. 이 세 가지 ‘열쇠’로 보면 독도 논쟁이라는 것은 처음부터 부질없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20세기에 들어서서 우리가 독도를 다시 실효 지배하게 된 것은 이승만 정부 때였다는 것도 잊어서는 안될 일입니다.
▶'유석재의 돌발史전’은 역사는 과거의 일이 아니라 현재진행형입니다. 뉴스의 홍수 속에서 한 줄기 역사의 단면이 드러나는 지점을 잡아 이야기를 풀어갑니다. 매주 금요일 새벽 여러분을 찾아뵙겠습니다.(조선일보발췌)
①세종실록 지리지: 우산국=울릉도+독도
라 지증왕 13년인 서기 512년에 이사부 장군이 ‘우산국(于山國)’을 정벌해 신라 땅으로 만들었다는 ‘삼국사기’의 기록은 잘 알려져 있습니다. 그런데 일본에선 “너희 역사책에 나오는 ‘우산국’은 독도가 아니라 울릉도”라는 사람들이 있어요. 독도의 옛 이름이 ‘우산도’여서 혼동이 일어난 것으로 보입니다. 15세기 책 ‘세종실록지리지’에는 그에 대한 정답이 분명히 적혀 있습니다. “우산과 무릉이라는 두 섬이 울진현 동쪽 바다 가운데 있다. 두 섬은 거리가 멀지 않아 날씨가 맑으면 바라볼 수 있다. 신라 때는 우산국이라 불렀다.” 여기서 ‘우산’은 독도, ‘무릉’은 울릉도의 옛 이름입니다. 신라 때 ‘우산국’은 ‘무릉’과 ‘우산’이란 두 섬으로 이뤄졌다는 것을 알 수 있죠. 정리하자면 ‘우산국=무릉도+우산도’, 다시 말해 ‘우산국=울릉도+독도’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서기 512년 신라의 이사부가 우산국을 정벌했을 때 독도도 당연히 함께 신라 땅이 된 것입니다. 하지만 일본은 정반대 주장을 하고 있습니다. 여기 나오는 ‘우산도’는 독도가 아니라 울릉도 근처에 있는 관음도나 죽도라는 겁니다. 하지만 관음도와 죽도는 울릉도와 아주 가까운 곳에 있어서 날씨가 맑지 않은 날에도 볼 수 있기 때문에 ‘세종실록 지리지’의 설명과는 맞지 않습니다. 그럼 날씨가 맑으면 정말 울릉도에서 독도가 보일까요? 이것조차 부정하는 일본인이 있습니다만, 인터넷에서 조금만 검색해 보면 수많은 ‘인증 사진’을 볼 수 있답니다.
②태정관 지령: 독도는 일본 땅 아니다
일본은 17세기에 자기들이 독도 주변에서 어업 활동을 하면서 독도 영유권을 확보했다는 ‘독도 고유 영토론’을 주장하고 있습니다. 1618년 한 일본 주민이 일본 지방정부에서 ‘바다를 건너갈 수 있다’는 허가인 ‘울릉도 도해(渡海) 면허’를 받았다는 거죠. 하지만 허가를 받아야 갈 수 있었다는 것은 오히려 울릉도와 독도를 일본 땅으로 생각하지 않았다는 증거가 됩니다. ‘고유 영토론’이라는 게 말이 되지 않음을 보여주는 결정적 자료가 바로 일본 측 문서인 1877년 ‘태정관 지령’입니다. 태정관은 당시 일본 최고 행정기관이었습니다. 당시 시마네현에서는 일부 어부가 고기잡이를 하러 갔던 울릉도와 독도가 자기들 땅인지 아닌지를 일본 정부에 물었습니다. 그랬더니 태정관에선 “울릉도와 한 섬(독도)은 본방(本邦·우리나라)과 관계없음을 명심할 것”이라고 답했습니다. 독도가 일본 땅이 아니라는 것을 일본 스스로 법적 효력을 지니는 문서에서 인정한 것입니다. 문서에 첨부된 약도를 보면 지령의 ‘한 섬’이란 독도를 가리킨다는 사실이 명백하게 드러납니다. 이것은 17세기 조선과 일본이 주고받은 외교 문서를 근거로 나온 지령이기 때문에 ‘독도는 조선 땅’이라는 선언이나 마찬가지였습니다.
③칙령 제41호: 독도는 대한제국 영토
일본은 러·일 전쟁 중이던 1905년 1월 28일 내각 회의에서 독도를 ‘주인 없는 땅’인무주지(無主地)라 여기고 일본 영토에 편입하기로 결정했습니다(‘독도는 우리 땅’ 노래의 ‘러일전쟁 직후에’라는 가사는 실제 사실과 약간 다릅니다). 이 논리는 뭔가 이상하지 않습니까? ‘17세기에 독도를 고유 영토로 확보했다’는 주장과 앞뒤가 맞지도 않는 것입니다. 이것은 일본이 한국을 침탈하는 과정에서 일어난 불법적인 일이었습니다. 무엇보다 ‘무주지’라는 건 터무니없는 말이었습니다. 이보다 5년 앞선 1900년 10월 25일에 대한제국이 ‘칙령 제41호’를 통해서 독도가 대한제국 영토라는 사실을 명백히 했기 때문입니다. 칙령 제41호는 울릉도를 ‘울도군’으로 승격하면서 울도군의 관할 구역에 ‘석도(石島)’가 들어간다고 명기했습니다. 대한제국이 근대법 형식으로 독도에 대한 직접 주권을 행사했다는 근거입니다. 여기서 ‘석도’가 어디인지가 문제가 됩니다. 19세기 후반 전라도 남해안 어민들이 울릉도로 많이 이주했는데, 이 지방 사투리는 ‘돌’을 ‘독’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독도를 본 어민들은 이 섬을 ‘돌섬’이란 뜻으로 ‘독섬’이라 했고, 한자어로는 ‘석도’라고 적었습니다. 결국 ‘독섬’이 ‘독도’로 변했던 것입니다. 지금도 전남 고흥에는 ‘독섬’ ‘석도’ ‘독도’란 지명이 모두 여러 곳 존재합니다. 그러나 호남 사투리를 모르는 일본 사람들과 국내 일부 극우 세력은 아직도 “석도가 왜 독도인지 도무지 이해할 수 없다”며 우기고 있는 것입니다. 칙령 제41호에는 울도 군수가 세금을 징수할 수 있는 권한을 가진다는 조항도 있습니다. 그럼 당시 독도에서 강치를 잡아가던 일본인들은 어떻게 했을지 주목할 만합니다. 그들은 대한제국 울도 군수에게 ‘수출세’를 내고 있었습니다. 만약 독도가 일본 땅이었다면 이런 세금을 냈을 리가 없습니다. 이 세 가지 ‘열쇠’로 보면 독도 논쟁이라는 것은 처음부터 부질없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20세기에 들어서서 우리가 독도를 다시 실효 지배하게 된 것은 이승만 정부 때였다는 것도 잊어서는 안될 일입니다.
▶'유석재의 돌발史전’은 역사는 과거의 일이 아니라 현재진행형입니다. 뉴스의 홍수 속에서 한 줄기 역사의 단면이 드러나는 지점을 잡아 이야기를 풀어갑니다. 매주 금요일 새벽 여러분을 찾아뵙겠습니다.(조선일보발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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